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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인생사

마지막 10대인 19살에서 끄적이는 나의 이야기

by LIKE IT.라이킷 2021. 12. 20.

 

*이 이야기는 모두 실화입니다.

 

 

시간 참 빠르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엉엉 울면서 엄마와 할머니나 찾던 내가 벌써 19살이고, 

벌써 내년이면 20살이라는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100세 인생 이런 식으로 보면 어떨때는 또 '이제서야 20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 포스팅은 정말 이 블로그의 취지와 관계없는 그저 마음 정리를 하고, 내 10대를 정리하기위한 글이다.

뭐 볼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개인 소장용이다

 

나중에 한 30대 때 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만약 본다면 나에 대해서 정말 많이 실망할 수도 있을것 같긴하지만, 

그래도 10대의 나쁜 습관, 기억, 과거들을 모두 다시 한 번더 정리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정리하게 됐다.

( 아, 맞춤법 같은거는 그냥 신경 쓰지마세요...ㅋㅋ )

 

이야기는 크게 일상&친구관계 / 공부 / 가족등등 이렇게 이어질 것 같다.

 

 

 


1. 일상 & 친구관계

 

어렸을적, 초등학교 입학할 당시 강북구에서 살던 나는 매우 소심하고 조금이라도 할머니가 멀어져있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얘였다.

떄문에 할머니 말씀으로는 할머니 이웃 친구분들께서 나를 엄청 잘 기억하고 계신다고 한다. 

 

거의 10살 이전까지는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난 오전 5시 새벽부터 일어나 놀이터에 놀러가자고 떄를 썼다고 했다.

지금은 오전 5시는 개뿔 오후 1시나 빠르면 오전 9시쯤에 일어나곤 한다. 

아무튼 그런 소심한 성격탓에 친한 친구는 3명, 가끔씩 반에서 그나마 친하게 놀던 애들 5명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당시 일상은 학교가서 애들이랑 놀고 1시쯤에 끝나서 집에와서 또 놀다가 저녁 6시쯤에서 8시까지 학원을 마치고

집에와서 또 논 기억 뿐이다. 가끔 학원 아래 뒷편에 있던 오락게임 기계 하나가 있던 곳에서 형 누나들과

같이 킹오파를 즐겼던 기억도 있다. 물론 형 누나들은 자기들 해야한다면서 나를 안끼워졌지만 한두번쯤 때를 쓰면 시켜주곤 했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놀면서 지내다보니 벌써 3학년, 이때부터 내 소심한 성격의 약점이 걸렸다. 

애들이랑 놀이터에서 놀다가 넘어져도 재밌게 놀다가 바지와 팬티쪽에 모래가 들어갔고

체육시간에 너무 불편해서 그 모래를 털었는데 반에 유사 일진이였던 애들 두명이 그걸 보고는 애들한테

내가 바지를 벗었다고 크게 소리치려고 했다. 

 

'아니 그게 아닌데... 모래만 털려고 했던 건데...' 억울하다며 애들한테 말해보고, 뭐했지만

거짓말 하지말라는 말만 오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나는 애들에게 5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중학생때 와서는 내가 아 진짜 이때 미쳤구나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심했던 성격의 밑천이 드러나

내가 자폭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애들에게 5만원을 각각 약속대로 줬고, 

이제 더 이상 아무말도 없겠지 하면서 나는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그럴리가 있나, 약점 잡힌 놈은 쎈놈이 아닌 나였다. 그것도 반에서 제일 소심하던 놈. 

애들은 5만원 더 내놓으라고 했고, 나는 그제서야 일이 완전히 잘못됐다는걸 알았다. 

그제서야 아빠한테가서 학교에서 있던일을 전부 말하고 학교는 또 난리가 났다. 

학교에서는 그 두 아이를 찾아서 내게 돈을 돌려놓으라고 했고, 나는 돈을 돌려받았고,

 

부모님한테는 크게 혼나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했다. 

가장 기억나는 말은 아빠가 했던 말씀이다.

"니가 씨 당한 만큼 애들한테 갚아. 이에는 이로 갚아야지. 가만히 있으면 안되지 왜 니가 거기서 5만원을 주겠다고 그래"

나는 이 말을 듣고 겉으론 알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에이씨 내가 그런걸 어떻게 해' 이러곤 했다. 

 

지금으로써는 이 말의 의미가 내 자식 누구한테 당하고 사는 꼴은 못보겠다는 걸로 이해했다. 

아빠도 저번 생신때 이 이야기를 내가 한 번더 꺼냈을때 내가 지금 생각했던 것 처럼 당하는 꼴 못본다는 심정이였으니..

 

암튼 나는 그정도로 소심했던 애고, 이 사건으로 나는 학교에서 놀림거리가 됐다. 

초등학교 4학년 말쯤에 전학을 갔는데, 그때까지도 그 무리 애들은 날 이걸로 놀렸다.

물론 나를 놀렸던 그 두 아이중 한명은 정말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기억나는건, 그 아이가 전학갔다가 4학년 1학기 때 잠시 우리학교에 들른 날이 있었는데,

내가 한창 좋아했던 리얼레이싱3라는 게임을 그 애도 하고 있었고 그걸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시 친해졌다. 나중에 5학년때 다시일로 전학을 온다고 했지만, 

 

나는 그때 이미 없었다.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으니까.

그때 전학가고서 내가 가장 크게 후회했던 이유가 이 애때문이였다. 

이렇게 친해질줄 몰랐으니까. 지금은 얼굴은 기억나도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전학 후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온 나는 4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 전

2주동안 나오는 기간에 새로운 학교를 들어갔다. 

 

아마 그때 애들이 날 보는 느낌은 비유를 하자면 군대에서 관심 병사 같은 느낌이였을 것이다.

원래 반에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빈 자리에 내가 들어왔는데, 처음에 어떻게 소개를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하다가

그래도 같은 조 애들이 처음에 굉장히 반겨줬다. 

 

낯설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해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가,

2주동안 학교를 나오는 날 중 어느날, 국어시간 아마 시를 써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했을 것이다.

계절을 주제로 해서 나는 봄을 주제로 썼고, 조당 발표시간, 

조에서 1명이 대표로 나와서 발표를 하는 식이였다.

 

우리조에서는 4명중 2명(나포함)이 하고 싶다고 했고, 

어쩌다보니 내가 발표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뒤로 이어졌다. 당시 금요일이였고, 나는 발표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에 학교를 가자 같은조 애들의 반응이 너무나도 싸늘했다.

 

이유가 뭘까 싶었다. 

내가 뭘 물어봐도 아무도 내게 답해주지 않고, 조 과제를 할때도 갑자기 따돌림을 당한 것이다.

이유를 모르겠다. 

'왜 난 여기까지 와서 또 다시 혼자가 되야 하지?'라며 학교를 가기가 싫어졌다. 

 

같은 조 애들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행동은 남은 1주일의 기간동안 진행됐고,

선생님께도 말씀드려봤지만 별다른 제재는 개뿔 오히려 공개처형만 당했다. 

애들이 있는 곳에서 다 말하니까 내가 몰래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했다고 오히려 더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금요일에 시 발표를 하던중 나말고 한명 더 하겠다고 했던 애의 표정이 생각났다.

진짜 진심으로 나를 경멸하고 화를 내고 싶은 눈빛이였던게 생각이 났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라고 생각했던게 기억이 났다. 

 

'아. 그 애가 주동자였구나.' 고작 발표하나 내가 가로챘다고 생각한거 때문에

같은 조 애들한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라고 한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화가 났다. 그리고 아빠가 저번에 했던말이 생각났다. 

 

'당한 만큼 갚아. 당하고 살지마.'

 

정말 마지막에 폭발해서 난 우리조 애들과 그 애를 정말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지만, 참았다. 나는 그런 짓을 할 빽도 없고, 힘도 없었으며,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될 것만 같았다. 

 

특히 오히려 학교에 더 크게 알려져 애들이 나를 더 안좋게 생각하는게 두려웠고. 

결국 나는 그 애들을 때리지 못했다. 

 

봄방학 당일, 

 

벛꽃이 피었던 그때

정말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까지 펑펑 울면서 갔다. 

결국엔 전학을 와도 똑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해졌고,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 

 

다행히 반 배정은 그때 같은 반애들이 한명도 없었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5학년, 우리반에 약간 어딘가 평범하지 않았던 애가 한명 왔다.

약간 모자라 보였지만 착했던 아이. 

 

키는 크지만 내가 무시했던 아이, 그리고 초등학교 생활중 내가 제일 후회하는 짓을 그 애에게 저질렀다.

처음부터 그애와 짝꿍이 됐고, 같이 지내다 보니 애가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점을 가지고 놀렸다. 주위 애들도 그 애를 놀리면서 놀았다.

 

하지만 그 애는 그래도 항상 웃으면서 헤벌레 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용서하며 같이 놀곤 했다. 

그리고는 어느날, 그애를 똑같이 놀리던 시기. 어떤 애가 내가 그애를 놀리는 모습이 기분이 나빴는지

 

"야 작작놀려 정도껏해 아무리 그래도 쟤한테 왜 그래? 보기 ㅈㄴ 불편해 진짜;"라고 말하기에

주위에 눈길이 신경쓰여 나도 그만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그애와 논다는 변명으로 그애를 놀리곤 했는데,

그 애가 갑자기 전학을 간다는 거다. 

 

'어....?'

나는 당황했다. 설마 나 떄문인가.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나. 

그제서야 다시 또 나에게 작작 놀리라고 했던 그 어떤 아이의 말이 생각 났고. 

내가 다른애들에게 당했던 짓을 지금 내가 이 얘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였으면 내가 바로 사과를 했겠지만.

 

그때는 뭔 자존감이였는지, 사과를 안했다. 그러자 그친구가

내게 와서 자기는 오늘이 학교 마지막 날이라면서 내게 선물을 줬다. 

사탕과 껌세트가 있는 주머니였는데, 그제서야 내가 그애에게 사과를 했다. 

 

고작 나보다 모자라다는 이유로 내가 이 애를 놀린다면 

나를 놀렸던 애들과 다를게 없지 않나 라는 생각과, 그 애가 느꼈을 감정이 혹시

내가 예전에 무시당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일까 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자란게 아닌, 정말 순수했던 아이였고, 

그 아이는 결국 다음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기분이 멍해졌다. 그리고 나 자신이 싫어졌다. 

그러고는 또 어영부영 지내다보니 금새 6학년, 중학교로 올라가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애들이 전부다 변했다. 

원래부터 그런 애들이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애들이 다 갑자기 칠판에 이상한걸 그려놨다.

 

'저게 뭐지...?' 마지막에서야 감이왔다. '아니 왜 저걸 칠판에 그려 미친ㅋㅋㅋㅋㅋ'

애들이 사춘기였다. 한창 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 

그리고 한창 성격 조절이 안되던 나이. 

 

내 사춘기는 늦게왔다. 중학교 2학년때 와서는 고등학교 1학년때 끝났다.

정말 질풍 노도의 시기의 아이들이 생각난다. 

하루종일 섹드립에, 그때 한창 또 유튜브에 어느 미친 유튜버 때문에 패드립이 그 당시 급식들(잼민이들)에게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서도 학교 내에서 이슈가 컸다. 

 

초등학교 6학년때 나를 놀리면서 놀던 무리 세 명이 있었다. 

당시에는 5학년때 내 업보다라고 생각했다. 가끔 그 애들이 놀리는건 재밌었지만,

계속 질리도록 하는건 기분이 드러웠나보다. 

 

그 애들과 중학교 1학년때 한 번더 같은 반이 되었다. 

솔직히 같은 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 개같네...'라고 생각했다.

물론 위에 질풍노도 시기의 그림을 그린 애들도 그 애들이다.

그 중한명은 반 대표 개변태로 불리기도 했다. (너무 밝히더라...ㅋㅋㅋ)

 

1학년때도 나는 그애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지냈고,

심지어는 자기 동아리가 안좋은게 걸렸다고 동아리 바꿔주면 자기가 더 안놀린다고 해서

바꿔줬다가 더 놀림을 당하곤 했다. 

 

그렇게 2학년때 다른 반이 되어 숨통이 틔었지만, 

계속 우리반에 놀러와서는 다른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보이면 놀리더라. 

물론 그 애 입장에서는 나랑 정말 놀고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거였으면 패드립은 하지말고 다녔어야지.

 

게다가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6학년 중학교 1학년때 하도 놀림을 받고 지내다보니 신물이 나있는 상태에서

결국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5월쯤 어느날에 학원의 친했던 친구와 하교를 하던중

그 무리들이 달려와 내 뒤통수를 때리며 내가 친했던 여자애와 엮는 섹드립한번, 

우리 부모님을 조롱하는 패드립 한번, 마지막에 가운데 손가락까지 4중콤보를 맛보고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느꼈다.

 

정도가 있지 아무리 당시 유행이던 패드립이나 섹드립을 하도 당한건 둘쨰쳐도

이젠 뒤통수를 치면서까지 저런 짓을 당하는게 너무 짜증나서

폭발했다. 

 

결국 학폭위에다가 신고를 했고, 그 애는 20시간...이였나 30시간이였나 사회봉사를 받게 되었다.

일을 잘 처리해주신 담임 선생님 덕분이였다.

 

문제는 그 뒤였다. 

 

어쩌다보니 내가 학폭위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게 확실하게 된 이유는 학폭위 조사관이였던 선생님들이 수업시간 중간에

자꾸 찾아오니까 애들이 내가 학폭위를 열었단걸 모를수가 있나.

 

처음에는 내가 학폭위를 열었다는걸 잘했다는 반응이였지만,

가면 갈수록 그딴걸로 학폭위를 왜 열었냐는 반응이 더 많게 바뀌었다.

 

심지어 처음에 잘했다던 애들도 내가 학폭위를 왜 열었냐며 나를 조롱했다. 

갑자기 바뀐 반응이나 그런거 때문에 나는 당황했고,

결국 그 애들과 또 말로 싸웠다. 그 애들은 '니가 X발 이딴식으로 행동하니까 쳐 놀림당하기나 하지'라고 말을 했다.

 

당시에는 '내가 문제였다고?'라며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꼈다.

왜 애들이 나를 욕하는 쪽으로 변했을까. 왜......

이유는 고등학생때 알 수 있었다.

 


 

고등학생, 특히 고1때는 가장 내 흑역사가 많았다.

 

나는 중학교가 있던 지역을 벗어나 멀리 있는 특성화고를 다니게 되었다. 

드디어 내 분야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들어간 카톡방. 

다시 초등학교 4학년때를 이어서 완전히 일면식 조차 없는 애들을 다시 처음부터 친구로 사귈 수 있다는 생각에

굉장히 설렜다.

 

특성화 고등학교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몇몇 애들은 가지고 있는 기기들 자랑들을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놀기도 했다. 특히 그때 맥북이 있던 애들이 있었는데 애들이 엄청나게 신기해 하기도 하고 부러워했다.

나도 맥북을 가지고 있는 애들을 부러워했으니까.

 

우리 학교는 노트북을 자유롭게 학교에 들고 다닐 수 있었고, 교복말고 사복을 매일 입을 수 있으며

반 12개를 3반씩 나누어서 4개의 학과로 쓰곤 해서 진짜 적어도 전문대학 느낌이 물씬 났다. 

학교도 처음에 올때는 길을 헷갈릴 정도로 너무 크다고 느껴서 정말 내가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의욕 넘치게 학교생활을 잘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학교를 입학했지만, 

학교 입학전에 애들끼리 만나면서 놀던 자리에서 너무 오버를 한 나머지 내가 많은 크고 작은 실수를 범했기 때문에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몇몇 애들은 나와 멀어졌다. 

 

특히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싶던 애들이 멀어지니 뭔가 강박이 생겼다.

'아냐. 여기와서도 이렇게 혼자 지낼 수는 없어.'

현실을 부정했었다. 

 

나는 그 애들에게 더 눈이 띄는게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상황만 악화될 뿐이였다. 

 

마음은 허해지고, 내가 점점 없어보였으며, 

고등학생때 까지 이러고 있는 날 보고서는 인간관계에 지쳐버렸다.

끝내 나는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입학한지 1학기도 지나기전에

우울증이 와버렸다. 

 

상담도 받고 별의 별짓을 다 해봤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우울증이 더 악화됐던 때는, 

오션월드로 학교에서 놀러가던 날. 

 

사실상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어짜피 놀러 가봤자 혼자다닐께 뻔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놀아보자고 다짐했고, 적어도 그쪽 프로그램 활동에는 최대한 같이 활동을 하며

즐겁다고 생각을 했다. 즐겁다라고 생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즐겁긴 개뿔 더 우울해져버렸다. 

같이 이야기를 하며 반응을 할 애들도 없고 기분은 더 한없이 우울해져 버려서 

그냥 숙소 구석에 찌그려져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뭐 프로그램으로 짝지어서 춤추는 프로그램이였는데,

우리반은 어쩌다 보니 홀수여서 또 나 혼자만 남게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에이 그럴수도 있지뭐~ㅋㅋㅋ'하면서 그랬겠지만,

 

그 당시 계속 우울해져만 갔던 나는 이런 짝짓는 활동에는 전혀 참여를 못하다보니

'진짜 나는 이 많은 애들중 친구가 단 한명도 없구나'라는 생각에 깊은 절망에 빠졌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내가 놀림 받고 투명인간 취급당했던건 정말 내 탓이였구나." 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남의 생각을 중요시 안하고 찌질하게 이기적으로 굴었으니....

 

아무튼 결국엔 오션월드에 아무도 없는 풀장에서 자살시도를 한 번 했었다. 

 

오후 5시경, 아외 풀장에서

깊은 물에 엎드려서 얼굴을 담구고는 숨을 안쉬려고 했고, 거의 2분가량 얼굴을 물에 처박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 유서같은건 못 썼는데.... 아빠랑 엄마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뭐라고 생각하실까.' 라며

생각을 하고선 적어도 유서 쓰고서는 죽자라고 생각해서 얼굴을 꺼낸 순간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야 너 어디야 지금 야외 풀장 문닫는데 빨리 들어와" 

 

이 말은 듣고는 한 10초간 내가 아무말도 못했다. 친구는 계속 여보세요??? 이러고 있었고,

몇십초가 지나서야 "어.... 알았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서는 엄청 울었다.

그렇게 극적인 순간은 아니였지만,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극적으로 내게 위로가 되었다. 

 

그 애와 숙소의 다른 애들과 만나서는 숙소에 돌아가서.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너무 우울해져서 자살시도 했다고.

 

그랬더니 애들은 '아니... 저기요 그냥 서로 친하다고 생각하는 애들끼리만 정말 친해지면 되지 왜이리 인생 피곤하게 살아'

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동안 내게 있던 '여기와서도 혼자지낼 수 없어. 다같이 나는 친해질거야'라는 강박들은 조금씩 사라졌다.

지금도 이 말을 해준 친구들과 계속 친하게 지내고 있다. 

 

정말 진심으로 이때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였고, 이때 내가 사춘기 말기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를 지나 고등학교 2학년때,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였던 애들은 내가 많이 차분해졌다고 말했다.

 

애들과 친해지려고 정신사납게 이야기 하며 계속 말을 하는데에 강박증이 없어지니 애가 갑자기 차분해졌다고 했다.

(물론 다른 애들과 비교하면 아직도 상대적으로 시끄럽다고 한다.)

 

하긴 지금 생각해도 1학년때는 강박적인 관종이였던 내가 지금 이렇게 변했으니 좀 신기하게 느껴졌다.(물론 지금도 관종이다.)

적어도 내적으로 성장했다고 느껴졌고, 당시 엄청 쪘던 살을 운동으로 뺴고 운동하면서 키가 크다보니

자존감과 자신감이 막 붙었다.

 

거기에 더 추진해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하고 싶던 게임 개발 팀 프로젝트도 하게 되며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느껴졌다.

 

중학교 3학년때 친했던 애들도 만나기도하고,

지금 애들과도 계속 잘지내는 중이다. 

 

그렇게 현재 고등학교 3학년,

할머니가 옆에 없으면 계속 울고 있던 7살짜리 꼬마는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2. 공부

  

"하 씨 나는 공부랑 연없다니까"

"아 다음번에 잘 보면 되겠지 뭐"

 

이게 내가 시험을 치고 가장 많이 하던 말이였다.

 

마지막으론 "야 나 이거 다찍음ㅋㅋㅋㅋㅋ" 이거 일 것이다...

 

초등학생때는 적어도 3학년 까진 올백이였다.

학원을 다녔으니까, 

 

그리고 그 이후로 초등학교 4학년때 부터는 무너졌다.

진짜 엄청나게 무너졌다. 

 

갑자기 영어구문 쓰기도, 영어 해석도 도저히 안됐다.

수학도 지금보면 굉장히 쉽지만 이때는 굉장히 어려워했다.

일차방정식이 뭐라고.... 

 

아마 내가 공부랑 가장 연이 없던 이유는 그냥 공부는 '고통스럽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였을거다.

어릴때 학원을 다닐때부터 억지로 억지로 하곤 했어서. 

 

방과후도 수학 방과후 영어 방과후 이런거 정말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했다.

솔직히 이때 가장 관심있던 공부는 이런 성적 공부말고

그림 공부 였을 것이다. 

 

기억하기로는 자동차를 너무 좋아해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했다.

(문제는 자동차 디자이너를 잘못 써서 자동차 디자인어라고 쓰기도 했다...ㅋㅋㅋ)

 

나는 그림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래서 순수미술도 좋아했고,

더군다나 더 발전해서 중학교 1학년때는 3D모델링을 독학으로 배워 메타세콰이어와 페파쿠라 디자이너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종이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더 발전해서는 3DSMax를 배워서 언리얼엔진에 적용하고는 스피드 레벨디자인을 한번 해보기도 했다.

그때는 단순 맵에 오브젝트 배치하는 거였고 엠비언트 오클루전이나 필터같은 포스트프로세싱이나

여러가지 최적화를 하는 방법을 몰라 언리얼 돌릴 때마다 렉걸려서 고생하며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보니 문득 게임이 만들고 싶어졌고, 6개월동안 최대한 노력해서 언리얼로 레벨디자인 포폴을 만들어

특성화고 특별전형 디자인과 포폴에 넣었다(프로그래밍은 안했다.)

 

그리고 이 3D모델링으로 특성화 고등학교도 가게 되었고, 그리고는

게임에 사용할 3D모델링을 배우다가 갑자기 진로가 틀어져서

프로그래머로 전향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것 중 하나가 바로 전과를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주위에서 내가 게임만들고 싶다고 하며 특성화 고등학교를 갔을때

"얘 디자인과 말고 프로그래밍과 갔어야 했던거 아니야...?" 라는 말이 꽤 많았는데.

 

이걸 2학년이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알았으면 내가 전과를 했지......) 뭐 결국 대학교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로 갔으니 별로 후회는 없다. 

다만 내가 디자인과 전공을 안하고 프로그래밍과로 급하게 틀어서 공부를 하다보니 디자인과 전공 성적이나 

내신 성적이 완전히 망한건 안타깝게 생각한다.(평균 5~6등급 사이)

(심지어 대학교도 일반 내신공부로는 가지 않았다.)

 

 


3. 가족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마지막 카테고리. '가족'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11살까지. 초등학교 4학년 까지 부모님은 사업을 하시고 계셨다.

적어도 내가 9살때까지는 어느정도 잘 됐던걸로 기억한다. 

다만, 2년동안 매우 상황이 악화되다보니 결국 부모님은 사업을 모두 접으셨고,

쌓인 재고와 다른 업체에게 내지 못한 돈들을 모두 빚이되었다.

 

사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12월 31일에 다른곳으로 이사를 간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빚이 대략 9000만원 정도로 있던걸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의 와서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친할머니께서 부모님 빚을 갚으려고

원래 살던 강북구의 집을 급하게 내놓다보니 현재 살고 있는 경기도의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던 것이였다.

때문에 빚은 대략 4000만원 정도를 갚을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절반 5000만원은 아직 갚아야할 돈으로 남아있다고 하신다.

 

이사하고 초등학교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 사이의 초등학교로 입학하기 전날, 

만약 친구들이 왜 여기로 이사를 왔냐고 물어보면 그냥 공기좋은 곳으로 오려고 했다고 말하라고 부탁하셨다.

사실 이때 어림 짐작은 했었다. 

 

적어도 쓸데없이 이런거에 눈치는 있던 편이였기에....

 

그래도 그때 당시에는 "알겠어용"하고 끝날 이야기였지만,

지금 와서 다시 저 말을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저 이야기를 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이사를 하고 한 3,4년간은 정말 가족 분위기가 안좋았다. 

거실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는데 방에서 부모님은 말다툼을 자주 하셨고,

급기야 집구조 자체 문제로 또 다툼이 생기셨다보니 상황이 많이 안좋았다.

 

물론 그럴떄마다 부모님은 화해를 하자며 나와 같이 외출을 하고서 밤에 치킨집에서 치킨을 뜯으며 서로 화해를 하셨다.

물론 내가 고민이 있을 때도, 내가 부모님중 한분과 싸웠을때도. 그리고 즐거울때도, 오랜만에 같이 쉬는 날일때도.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1월부터 분위기가 안좋았다. 

아빠는 갑작스레 우울증에 걸리셨다. 당시에는 못들었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들어보니

택배일을 하시면서 내가 갑자기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한없이 무기력해졌다고 하신다. 

2019년 연초부터 3달간 계속 우울해 하셨다. 

 

내가 말을 걸어도, 엄마가 말을 걸어도 할머니가 말을 걸어도 아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우울증에 걸린 것에 대해서 자기 잘못이라고 말씀하셨고, 집 전체가 우울해져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빠는 우울증에 빠져 나올려고 계속 시도를 하고 노력을 하셔서 다행히도 원래대로 돌아오셨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난다. 전날, 내가 한창 우울증에 걸려있는 아빠께 말도 걸어보고 재밌는거도 다 해보려고 했지만

아빠는 반응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무시해버리셔서 결국엔 그날 새벽 이불을 깊게 덮어쓴채 나도 지쳐버렸는지

'더 이상 저 사람과 다시는 이야기를 안할거야'라며 왜 상황이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덩달아 우울해하며 울어버렸다.

 

아빠에게 화가났다. 그때 나는 아빠가 뭐 때문에 저렇게 됐는지 갑자기 왜 저리 변해버렸는지

알지도 못하고 답답하고 이해를 못해서 괜히 철없는 다짐만 계속 했던 것 같다.

다음날 일어나서는 나도 무기력하게 변해버렸고, 더 이상 부모님 방안에 있는 아빠를 보러가지도 않았다.

 

밥먹을때도 옆에서 말을 걸었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나까지 우울해져버리니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나한테 말을 못거셨다.

그러다가 데스크탑 수리를 하려고 공구함을 꺼내던 와중,

 

그제서야 아빠가 '요즘 그래픽카드 GTX16XX시리즈 나왔냐?'라며 말을 걸었다.

처음엔 그냥 대답 안할까 싶었지만 며칠간 아무말도 안하던 아빠가 말을 거는것이 너무 반가워서

"나온지 한 달됐어 이 아저씨야....."라며 대답해주었다.

 

그제서야 아빠가 원래대로 돌아오셨다. 이후로는 숨통이좀 트이더라..... 싶더니

 

 

 

 

 

 

코로나. 

 

이 망할놈의 우한폐렴.

 

2020년 1월말 갑작스레 우한폐렴이라는 바이러스가 생겨났다고 뉴스에서 나왔다.

에이 뭐 별거 아니겠지 뭐 했지만, 꽤나 뉴스에서 심각하게 다뤄졌고, 

 

결과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하루 5000~7000명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솔직히 너무 지친다. 

 

이때 학교도 제대로 못나갔고, 수학여행도 취소에, 마스크는 2년째 쓰고있고,

무엇보다. 

 

코로나 시기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마지막(임종)을 같이 해드리지 못했다는게 너무 슬프다.

할아버지는 2020년 5월쯤 부터 갑작스래 복통을 호소하셔서 

대학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대장암이 초기라고 하셨고, 

그나마 초기에 발병하셔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수술후 할아버지는 굉장히 야위셨고, 걸음도 제대로 못걸으셨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도 정말 고생하셨지만 엄마와 할머니께서 너무 고생하셨다. 

하루종일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돌보시면서 할머니도 살이 빠지시는게 눈으로 보여서

너무 안타까웠다. 

 

거기에 어쩌다보니 건강검진까지 같이 받으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당뇨에 치매초기까지 나왔다고 했다.

나는 주위에 사람중 치매에 걸리신 분이 없으셔서 사실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이게 갑자기 할아버지꼐서 치매에 걸리셨다고 하니

뭔가....기분이 묘했다. 

 

뭔가 더 상황이 안 좋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최대한 회피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 생신이 지나서, 2021년 올해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전보다 확실히 많이 회복하셨다. 

수술 받으시고 6개월 새에 살이 많이 붙으셨고, 할머니도 이제 예전처럼 할아버지를 돌볼 필요는 없으셔서

할머니 건강도 조금은 되돌아 오셨다.

 

설날에 다들 할아버지가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에 축하해주셨고,

이번 올해는 안전하게 지나가는 줄 알았으나,

또다시 올해 5월에 어느날 오후 3시쯤에 할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신다

 

집바로 아래에 중랑천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곳의 돌계단을 올라오시다가 발이 미끄러지셔서

뒤로 굴러버리셨다. 

 

엄마와 나는 집에 있에 있는데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난생 처음 보는 목소리가 들어와 

당황했고, 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한걸 알고서는 사고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엄마는 길을 헤맸는지 나와 다른 길로 갔고,

가족중 가장먼저 내가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계단 옆에 돌에 앉으셔서 계셨고 어떤 아저씨 분께서 터진 코피를 닦아주고 계셨고

피로 물들은 마스크도 새걸로 사다가 가져다 주셨다. 

 

할아버지 하며 부르며 나는 살짝 뛰어갔고, 상황을 들어보니 위에 같은 상황이 났던 것이다.

뒤이어 산책갔다 오시던 할머니와, 엄마가 오셨다. 

 

일단 할아버지께서는 아픈곳은 없어보이셔서 집으로 모셔와서 침대에 눕히려던 그때

할아버지가 허리가 엄청나게 아프시다면서 고통을 호소하셨다. 

 

병원에 가보니 허리골절. 

 

대장암이 그나마 낫고 있던 시기에 이런사고로 허리골절로 인해 1년만에 다시 

병원으로 입원하시게 되었다.

 

더군다나 코로나는 아니지만 폐렴에 걸리시고 치매까지 악화되시고,

목에 가래도 잘 못넘기셔서 전화통화를 해도 할아버지 말씀을 발음이 제대로 안들려서 제대로 못듣기도 했고,

 

전화통화가 되는날에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면 가끔은 할아버지가

"그런데 할머닌 누구세요?" 라고 하셔서 할머니가 당황하면서 웃으셨던게 기억난다.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한 통화는 

8월 초쯤에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전화 통화하다가 내 목소리 듣고 싶다고 하셔서

잠시 전화통화를 하며 빨리 나으시고 돌아오시라고 한 거 밖에 없다. 

 

그리고 8월 24일에 학교를 갔다 오고 집에 들어가니.

엄마랑 할머니가 다급하게 뭔갈 준비하고 있다. 

 

할머니께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할아버지 돌아가셨데"

 

나는 처음에 무슨소리인지 몰랐다. 정확히는 잘 못들었다. 

자전거로 열심히 달리고 집에 도착하고 숨찬 직후라 제대로 못들었다.

 

다시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데."

 

그제서야 나는 상황파악을 했다.

엄마는 울먹거리시며 통화를 하고 있고,

 

할머니도 눈물을 흘리시며 일단 당일 예약된 치과먼저 다녀오고

이따가 저녁에 연락하면 그때 아빠랑 같이 오라고 하셨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치과고 뭐고 그게 문제인가 싶었다.

실감이 안났다. 처음 들었을때 내가 했던 반응은,

 

'그래...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 마음의 준비 다 했잖아.'였다.

그러고는 치과를 가기위해 도로를 걸어가는데도 아무렇지 않고 무덤덤 하길래 괜찮나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잠깐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상실감을 느꼈고, 

눈물이 핑돌았다. 

 

적어도 내가 대학 가는거라고 보고 가시지 라고 생각했다. 

 

일단 도로이니 생각을 멈추고 빨리 치과로 향했다. 

치과로 향해서 일단 내일 당장 학교를 못나간다고 담임쌤께 연락을 드리려고 했다.

근데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생각을 하다보니 상실감이 커졌고

결국엔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전화는 해야겠는데 계속 울음이 나고 목이 메이다 보니 전화도 못하겠고

어쩌지 하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가 가장먼저 하는 말은 "어...괜찮아...?"였다.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말했다. 일단 엄마와 할머니는 영안실에 도착했다고 하셨다.

너무 울지말고 내일 학교 못간다고 전화하고 아빠와 같이 오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엄마는 병원에서 전화를 받을 당시 코로나 백신을 맞다가 전화를 받은 것이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조차도 저 눈앞의 장면이 생생하다.

그날 치과치료는 매번 아프던 신경치료와는 달리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아프면 움찔하던 예전 치료와는 달리 미동조차 없을정도로 너무 슬펐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까 치과로 가던때와 달리 울며 걸어갔고, 

집 1층 주차장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진짜 울음이 엄청 터졌다. 

내가 이 정도로 울 수가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크고 길게 할아버지 방안에서 울었다.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는게 10대 마지막인 19살이라는게, 대학들어가기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가시는게 너무 슬펐다. 

 

울면서 했던말은 '적어도 나 대학 들어가는거 라도 보고가시지'아니면 '고등학교 졸업하는거 보고가시지'였다.

거의 입원하시고 3달동안 못 뵈었는데 혼자 돌아가셨을거 생각하면 아직도 내가 심적으로 힘들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며칠전 꿈을 꿨다. 꿈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식이고 코로나 때문에 반에서 졸업식을 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교실 뒷문에 오셔서 한번 날 보시고 돌아가시길래 교문 가운데 정문앞으로 쫓아가서

"할아버지"라며 한 번 불렀지만, 할아버지는 뒤로 쓱 한 번만 돌아보시고 그대로 가셨다.

 

그때 이게 뭔꿈이지 싶었는데

이 꿈이였구나 싶었다.

 

정신없이 울고나니 6시, 지쳐 쇼파에서 잠들고 아빠 와서 일어나니 7시

아빠는 평소와 다른점 없이 "왔슈~"하면서 들어오셨다. 

아빠도 소식을 듣긴 들었다고 했다. 다만, 실감이 지금은 잘 안난다고.

막내 고모한테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 돌아가셨다는 말듣고 "뭔 개소리야?"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간단하게 컵라면을 아빠와 끓여먹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분위기는 말 그대로 암울했고, 

아빠는 아직도 실감이 안나신다고 한다. 

 

일단 너무 저녁이 늦어서 다음날부터 오시는 분들 받는 걸로하고

다음날이 되고 계속 많은 분들이 조문오셨다.(물론 코로나라서 못오시고 부조금만 계좌로 보내시는 분들도 계셨다.)

 

장례 절차를 듣고서는 아침에 한번 제사....는 아니고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끝나고 조문을 받고 나서는 오후 4시가 되었다. 

아빠는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고 하신다. 

 

그리고는 이제 정말 할아버지를 뵈러간다. 

 

처음엔 안울려고 했지만, 어떻게 안울겠어 당연히 소리없이 엄청 울었다.

 

장례지도사 말로는 할아버지가 눈을 못감으시고 감겨드려도 자꾸 뜨신다고 했다. 일단 이 점 양해 바란다고 하고 진행했다.

아빠가 할아버지쪽 칸으로 들어가고 장례지도사가 하시는걸 도와주셨다.

처음에는 막말로 정말 모형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얼굴쪽 천이 걷어지고 할아버지 얼굴이 보여졌다.

곧 상복을 입히시고 들어가 할아버지를 뵈었다. 차례대로 모두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뵈었다. 

'아 진짜 돌아가셨구나'라고 실감이 났다. 상복을 입혀주실때 고개가 중심을 잃어 옆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힘없이 돌아가는 걸 보고 충격먹었었다. 

 

나는 들어가서 맨처음엔 할아버지 발 아래에 섰다.

예전에 발을 주물러드린 적이 있어서 한번 발을 잡았는데,

천위로도 온기가 아닌 냉기가 느껴졌다. 굉장히 차갑다. 

그리고는 순서대로 할아버지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렸다. 

나는 한 번만 할라다가 한번더 할아버지가 보고싶어서 한 번더 인사드렸다. 

너무 죄송스러웠다. 병원 입원해계실때 면회를 못간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코로나 때문에 못간다고 하지만 마지막 임종때라도 뵐 수는 있었는데

엄마 말씀을 들어보니 그건 또 의사가 너무 늦게 알려줘서 임종을 못 지켜드렸다고 한다.

 

진짜 이 순간 만큼은 미쳐버리는줄 알았다.

그 의사에 대한 분노, 코로나에 대한 분노, 자주 연락을 못드린것도 죄송하고, 모든게 다 죄송스럽더라.

 

할아버지 돌아가시고나서 저녁에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가 하는 말이 '최대한 많이 울어드려라.'였다. 그말이 자꾸 떠올라 한 없이 울어드렸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관속에 넣어드리고 우리는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그제서야 실감했는지 굉장히 우울해져있다. 

나도 덩달아 너무 우울해져서 아빠 옆에 앉아있었다. 한 그대로 30분 1시간 흘러서

멍떄리면서 옛날 이야기하고 조문객 받고 지내다 보니 하루가 다지나갔다.

 

마지막날엔 정식으로 제사를 하고 리무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작은할아버지와 내가 타고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터에서 모두 대성통곡을 질렀다.

할아버지 관 옆부분 아래에 있는 할어버지 성함이 쓰인 관이 화장하러 들어가는데

과연 누가 안 울수 있을까.

 

이때 나는 지난 고등학교 1학년을 회상했다. 

그떄 단지 친구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만약 그때 내가 정말 죽었다면 지금 나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모두 절망 했을거다. 

그 화장터에서 다시는 자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 화장이 끝나고, 안치하러 광주쪽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안치를 마치고 친척들은 개개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할머니, 엄마, 아빠는 타고온 장례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오고

장례지도사와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전 집 근처 사거리에 있는 순대국 집에 들려서 

순대국을 먹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할아버지 장례가 마무리 되었다. 

사촌형이 했던 말이 기억나는데, 형내 할머니께서 올해 초반에 돌아가시고 나서

1달이 금방지나갈거 같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했는데, 우린 벌써 4개월이나 흘렀다.

 

시간 참 빠르다..... 눈도 오고...

 

글을 쓴지 4시간, 꽤나 많이 썼다. 

그리고 쓰면서 콧물 눈물 다 뺐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면 눈물이 엄청 나오고 다 쓰고나면 그때처럼

몸에 기운이 없어져 버린다. 

 

그래도 과거는 과거이니 머물르지 않고 나아가야하니 더 힘내서 내년을 맞이해보자.

 

 


- 마지막으로 인사

 

지금까지 제 라이킷 블로그를 계속 봐주신 여러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일상 & 친구 관계에서 보셨듯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없다고 생각한 시절

장비라도 좋은거 사면 애들이 관심가져 줄거라고 생각한걸로 인해서 

어쩌다보니 이 블로그 까지 계속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포스팅을 하며 많이 실수를 했을텐데, 너그럽게 봐주시고,

피드백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 관종 라이킷은 계속 활동을 할겁니다. 원래 유튜브도 계획을 했는데,

이건 아무래도 일정상 힘들거 같더군요....ㅠㅠ

 

암튼 다음 포스팅은 내년 1월 1일에 쓰는 걸로 하고 

남은 연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모두 다들 건강하길 빕니다. 

 

 

그리구 우리 할아버지 아프지 말고 그곳에선 잘 지내시길 바래용 :D

밥드시면서 바라볼떄마다 웃어주시고 손으로 굿~ 해주시던 할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저도 뵈러 가겠죠. 그날까지 거기서 잘 지내주시면서 저 지켜봐주세요.

 

 

작성일 - 2021/12/20(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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